The Passion of The Christ

이전의 성서 영화보다 한 걸음 나아간 점은

예수의 고난을 실제에 (지금까지의 영화와 비교해서는) 가장 근접하게
표현한 점이 아닐까 합니다.

지나친 폭력성에 대한 논란도 있는 듯 한데
(여기 게시판에도 그러한 주장의 글도 있고요)

사실 이런 폭력적인 장면이 사실적 묘사라는 것은 역사적 연구를 통해 이미 알려진 사실입니다.

물론 성서는 그 장면 자체를 자세하게 묘사하지는 않습니다.

단지 그가 제사장의 하인들로부터 얻어맞고 조롱당한 것,
로마 군인들에 의해 채찍질 당했고 놀림받으며 맞은 것,
그리고 십자가 처형을 받았다는 사실을 담담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적 고증에 의해
당시 로마의 채찍질과 십자가 처형의 그 끔찍함이 어떠했는지는
역사적, 의학적 학문적 연구를 통해
받아들여진 사실입니다.

그래서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은 사형을 당해도 십자가 형벌은 받지 않게 되어 있었죠.
인권을 가진 ‘시민’이 당하기엔 너무나 끔찍한 형벌이었기에..

또 이 영화에서는 채찍도 역사적으로 근접하게 묘사되었습니다.
3세기의 유세비우스는 당시 태형(몽둥이, 채찍 등으로 때리는 형벌)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태형을 당하는 사람의 정맥이 밖으로 드러났고, 근육, 근골, 창자의 일부가 노출되었다.”

그러므로 멜 깁슨은 자기의 상상력으로 고난 장면을 과장한 것이 아니라
이미 상식이 된 사실을 받아들여 작업한 것이죠.
여기서 그가 새롭게 기여한 바는 그 상식을 ‘영상’으로 담아냈다는 것이죠.
(사실 위의 유세비우스의 말을 참고한다면
멜 깁슨은 과장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축소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더 리얼하게 묘사하면 등급 판정 불가가 될 수도…)

예수는 목수 출신이었고 각지를 걸어다니며 가르친 ‘신체 건강한 장정’이었다고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중세 시대 성화의 바짝 마른 이미지와는 달리)
그런데 그렇게 건강한 그가 다른 죄수들과는 달리
십자가 나무를 끝까지 짊어지지 못했고
십자가 위에서 며칠이 아니라 몇 시간만에 숨을 거둔 것은
바로 태형을 심하게 당한 것 때문이라고 여겨지고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성서 영화들이 예수의 고난 부분을 너무 고상하게 다루어
예수의 고통이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게 할 가능성이 있었고
이런 시각은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예수를 허공에 뜬 비현실적 인간으로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성서는
예수가 이 땅에 발을 딛고 함께 호흡한 가장 인간다운 인간이었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겟세마네에서의 기도가 그 대표적 모습 중 하나이죠.
“가능하다면 이 길을 피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 원합니다”)

그런데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를 통해 예수가 고통을 어떻게 겪었는지
좀더 자세하게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물론 꼭 이렇게 리얼하게 알아야 하는가 라는 질문도 나올 수 있습니다.
사실 성서도 리얼한 묘사에 지면을 할애하지는 않았죠.)

아무튼 신의 뜻을 따라 고난의 길을 걸어간 예수의 인간적 면모를 볼 수 있게
도와주었다는 점에 이 영화의 가치를 둘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예수의 인간적 면모는 사실 성서의 관심사이기도 합니다.

(이하 이 영화를 통해 느끼는 저의 감흥과
저의 소원입니다. 그래서 독백체로 반말로…^^
그러나 예전에 쓴 글이라 말투가 바뀐 것은 아니랍니다. 지금 쓴 글입니다. ^^)
……………………..

그래. 성서는 사실
예수가 이 땅에 발을 딛고 함께 호흡한 가장 인간다운 인간이었다고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성서는 이렇게
그의 인간다운 면모를 보여주면서, 그리고 그의 비참한 죽음을 말하면서

아이러니하게도 그를 가리켜
“그는 신이 육신을 입고 온 존재였다.
그는 유일하신 참 신의 아들이다.
그는 우리 인류와 온 세계를 죽음과 죄의 폭압으로부터 건져
유일하신 신의 통치 아래에서 누리는 참 생명으로 이끌기 위해
그의 아버지에 의해 보냄받았다.”
라고 과감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교의 역설이다.

죽음을 통해 생명을 가져온다는…

무능한 실패자 같고 바보 같은 한 사람이 걸어간 그 길이
바로 세상의 유일한 희망임을…

세상을 만든 신이 세상을 구원하는 유일한 방법은
가장 밑바닥으로 내려오는 것이었음을…

그리고 그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도
그 바보 같은 길을 따라야 한다는…

그래서 이 게시판에 올라오고 있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비판…
어떤 면에서 일리 있다.(물론 잘 모르면서 싸잡아서 말하는 글도 가끔 있지만)

사실 예수의 길을 철저히 따르는 데 있어서
그의 제자인 교회가 2천년 역사 속에서 실패한 경우가 매우 많다.
가룟 유다처럼…
예수를 자신의 기대를 채워줄 인물로 여기고 따라다니다가
자신의 뜻과 그의 뜻이 다르다는 것을 알고 그를 팔아버린 가룟 유다…
오늘도 예수의 제자임을 자처하지만
겉으로만 예수 이름을 표방하지 정작 자기 뜻과 고집대로 가는 경우가 많다..
나는 어떤가…?

역사 속에서의 실패를 뼈 아프게 가슴에 새기며 오늘의 제자들은
그러한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피흘리며 그를 따라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예수의 제자들도 역사 속에 아름다운 발자취를 많이 남기고 있다.
(그들도 불완전했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진지하고 정직하게 고민하며
자신의 목숨을 던져 그 길을 따랐지..)
사실 진정한 제자들의 많은 경우는 역사의 표면에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다.

그래. 그러니까…
소망을 가져본다.
그리스도교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
(여기까지 읽으셨다면 참 감사합니다~)

예수의 제자들의 실패를 핑계 삼아
편안하게 숨어버리지 않으면 참 좋겠다..

이런 문제 의식을 가져 보기를 소망해 본다..

“도대체 예수는 누구이길래,
자신을 그토록 특별한 존재로 생각하면서도
그토록 밑바닥의 길을 스스로 택하여 갔는지,
그런 그의 존재가 내 인생에 어떤 부담과 압박의 의미가 되는지…”

이 영화를 통해 진지하게 스스로에게 한번 물어 보면 참 좋겠다..
(사실 이 영화는 서구 기독교인을 많이 염두에 둔 것 같긴 하다.
예수를 믿건 안 믿건 성서의 사건들에 대해 기본적 지식이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그래서 간간히 삽입된 예수의 생애 장면에 대한 설명이 많이 생략된 점이나
예수의 말의 의미에 대해서도 설명이 적다는 점은 동양인으로서는 아쉬운 대목이다..)
비록 영화에 많은 설명이 생략되어 있으나
목적 의식을 갖고 고난의 길을 걷는 예수의 얼굴에서
무언가를 발견하면 좋겠다.

————–
(여기서 잠깐… 하나 생각난 것이 있군요)
“예수는 자신을 신의 아들로 여긴 적이 없었는데
예수의 제자들이 나중에 그렇게 만들어 버린 거야”라고 의문을 갖는 사람이
혹시 아직 있습니까?

한때 그런 견해가 풍미한 시대도 있었지만..
하지만 지금은 진지한 문헌적 연구의 수많은 도전을 거치면서
제자들의 기록을 통해 접근할 수 있는 역사적 사실에 대해
다음과 같은 최소한의 사항들은 분명한 사실임이었음이
진지한 연구가들에 의해 인정되고 있습니다.

“적어도 예수라는 역사적 인물이 있었으며,
그는 세상을 놀라게 할 만한 기적(병을 고치고 악마를 쫓아내어 사람의 인생을 회복시키는 일)을 행하였으며(적대자들로부터 ‘귀신의 왕’의 힘을 빌린다는 비방을 받을 정도로 놀라운 일들을 행했죠),
자신이 ‘약속된 메시야’라는 사실을 외부인들에게는 말로 표방하지 않았으나 수많은 상징적 행동을 통해 암시하다가 결정적으로 재판정에서 말로 표방하여 결국 죽음으로 가게 되었고
자신을 따르는 이들에게는 좀더 자세한 것을 가르쳤는데
그는 자신의 죽음을 암시하는 말을 계속 하였고
자신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야만
세상이 사는 길이 열린다는 것을 가르쳤으며
하나님을 (당시 유대인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이 불경하게도) 감히 아버지라고 부르며
아버지의 전권을 자신이 갖고 있음을 주장한 존재,
그러면서도 군중의 힘을 이용한 정치적 입지 다지기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가난하고 억눌린 자들을 위해 끝까지 봉사하다가
내 봉사의 절정은 나의 죽음이라고 말하면서 죽음의 길을 알면서도 피하지 않은 사람.
그런 사람이 있었다.
그는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 붙들려 로마의 법에 의해 처형당했는데
그의 제자들은 그가 다시 살아났다고 주장하며
자기 생명을 바쳐 가면서 그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즉 예수는 분명히 독특한 자의식을 갖고 있었다는 면이
진지한 학문적 연구에 의해서도 점점 공유되고 있습니다.
‘자신이 신의 아들, 구세주이며 세상을 위해 죽기 위해 세상에 왔다’라는 자의식..
그것이 참인지 착각인지에 대한 판단은 여러분의 몫이죠…

(글의 성격이 점점 영화 이야기에서 예수 이야기로 짙어지고 있죠? ^^*)

다시 독백으로…
———————
건전한 상식으로 볼 때 미치광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 자의식(“나는 신의 아들”)을 갖고 있었으면서
그리고 사람들을 회복시키는 신기한 능력을 갖고 있으면서도
(보통 이 정도 상황이 되면 그 다음 결론은
세력을 집결하여 거점을 만들고 뭔가 역사에 남을만한 일을 내는 것이 순서인데
그러기는 커녕 그런 꿈을 갖고 있던 제자들을 오히려 꾸짖으면서)
어리석을 정도로 타협하지 않고 오직 사람들에게 가르치기를
“세상의 주인이신 그분, 아버지께서 역사 속에 개입하시어 새 일을 이루실 시간이 다가왔다.
이제 자기 밥그릇 챙기며 살던 자리에서 먼지를 털고 일어나 나를 따라오라”라고 하시며
자기 자신의 죽음을 통해 새 세상이 열린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더니
결국 적대 세력의 중심부에 뛰어들면서 진짜 죽음의 길을 스스로 택하여 죽어버린,
어리석게 보이는 기이한 인물…

그런 인간이 실제로 역사 속에 있었음을 알게 되었을 때의 그 충격.
내 삶을 가만 두지 않는 인물.
삶과 우주의 의미를 새롭게 보게 하는 그의 존재 앞에 선 그 느낌.
나를 향해 건네어진 그의 손길 앞에서 두근거리는 심장 박동.

그의 극단적인 주장 때문에 우리는 회색 지대에 설 수 없게 되었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고 인정하고 자리를 털고 일어나 그를 따르든지,
아니면
그는 사기꾼이었거나 혹은 (착하긴 했지만 어리석었던) 과대망상증 환자였다고
치부해 버리고 계속 자기 생각대로 가던 길을 가든지 말이다.
……………………..

긴 글을 맺습니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고 인정은 하면서도 계속 밥그릇 쥐고 앉아 있으려 했던 제자들.
(당시의 제자들 말고 후대의 많은 제자들 말입니다)
그러한 후대의 많은 제자들의 실패 때문에
예수 본인의 존재까지 가려지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교회에 거부감을 갖는 분들이
교회의 실패를 핑계로
예수라는 이 기이한 존재에 대한 부담감으로부터
숨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예수를 입으로 인정하면서도 내 밥그릇 계속 쥐고 있고 싶어하는
‘무늬만 제자들’에게
멜 깁슨의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와 함께 한 시간이

단지 봄날 한때의 눈물샘 자극의 시간으로만 그치지 않고

나의 삶의 의미를 바꾸어 버린 그분의 죽음을 다시 묵상하는 시간이 되어

밥그릇 쥐고 있던 자리를 털고 일어나
그분의 길,
바로 ‘다른 이를 살리기 위한 고난의 길’을
따르는 계기가 되기를
(바로 저 자신을 포함하여 말이죠)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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